회사가 어려워져 상가를 뺐는데, 보증금에서 위약벌까지 싹 다 떼인다고요?
(대법원 2025. 7. 18. 선고 2022다311736 판결)
원고(임차인)는 피고(건물주)로부터 건물을 빌리면서 임대차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때 계약서에는 아주 무서운 특약이 하나 있었습니다. “만약 임차인 측 사정으로 계약을 중간에 깨고 나가게 되면, 임차인은 건물주에게 ‘위약벌(벌금)’과 ‘손해배상 예정액’을 지급해야 하고, 건물주는 이를 보증금에서 맘대로 깔 수 있다(공제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원고 회사는 경영난으로 법원의 ‘회생절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던 원고의 관리인은 결국 이 임대차계약을 해지하고 건물을 건물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후 회생절차가 무사히 끝난 원고는 건물주에게 요구했습니다. “밀린 월세는 빼고, 남은 보증금은 돌려주세요.”
하지만 건물주는 계약서를 들이밀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무슨 소리! 계약 중간에 나갔으니 약속대로 ‘위약벌’이랑 ‘손해배상액’을 보증금에서 공제(차감)하겠습니다. 다 까고 나니 돌려줄 보증금이 한 푼도 안 남네요!”
서로 합의해서 쓴 계약서이긴 하지만, 법의 철저한 관리를 받는 ‘회생절차’ 중에도 건물주 마음대로 보증금에서 빚을 싹 다 퉁칠 수 있는 걸까요?


1. 사건의 핵심 쟁점
원칙적으로 당사자끼리 “내 빚이랑 네 빚이랑 서로 까자(공제하자)”라고 약속하는 것은 계약의 자유에 따라 유효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핵심은 한쪽 회사가 ‘회생절차’에 들어간 특수한 상황에서도, 서로 밀접한 관련(견련성)이 없는 채권들끼리 마음대로 공제하는 약정이 유효한지 여부입니다.

2. 대법원의 판단
대법원은 계약서에 적혀있더라도, ‘손해배상 예정액’은 보증금에서 뺄 수 있지만 ‘위약벌’은 뺄 수 없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 회생절차의 특수성과 ‘상계 금지’ 원칙: 회생절차는 빚잔치를 공평하게 하고 회사를 살리기 위한 제도입니다. 그래서 채권자가 자기 마음대로 채무자의 돈과 자기 빚을 퉁치는 ‘상계’를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강행규정).
- ‘공제’도 아무거나 다 허용되진 않는다: ‘공제’ 역시 상계와 비슷하게 돈을 퉁치는 효과가 있습니다. 대법원은 빚끼리 서로 밀접한 관련(견련성)이 있을 때만 공제를 허용해야, 다른 채권자들에게 불공평하지 않고 회생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3. ‘손해배상 예정액’ VS ‘위약벌’, 무엇이 다를까?
대법원은 두 가지 돈의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보았습니다.

- 손해배상 예정액 (공제 가능): 임대차보증금은 원래 세입자가 월세를 안 내거나 훼손하여 발생한 ‘손해’를 담보하기 위해 맡겨두는 돈입니다. 따라서 ‘손해배상 예정액’은 임대차계약 본질상 보증금과 밀접한 관련(견련성)이 있으므로, 회생절차 중이라도 보증금에서 깔 수 있습니다.
- 위약벌 (공제 불가): 반면 ‘위약벌’은 실제 손해를 물어주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일종의 ‘징벌적 벌금’입니다. 이는 임대차보증금이 본래 담보하려는 목적과 거리가 멀어 관련성(견련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원고가 회생절차에 들어간 이상, 건물주는 보증금에서 위약벌을 마음대로 공제할 수 없습니다.
4. 결론
대법원은 회생절차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관련성 없는 채권의 공제 약정은 무효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피고(건물주)는 임대차보증금에서 ‘위약벌’ 명목의 돈을 마음대로 떼어낼 수 없으며, 그만큼의 보증금은 원고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